스토아학파 vs. 스피노자 비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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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 vs. 스피노자 비교 분석
이상(理想) 도덕·윤리 연구소
소장 임재섭
얼마 전 연구소 카페에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를 비교 분석하는 칼럼을 요청받고, 시험 기간을 지나서 칼럼을 실제로 집필하기까지 적잖이 시간이 걸렸습니다. 내용 자체가 그리 어려운 건 아닌데, 수능의 실전 개념으로 학생들이 써먹을 수 있을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바꾸기가 참으로 곤란하고, 또 교육 과정의 선을 지키면서 내용을 소개하기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고심 끝에 내용을 추려 보았습니다. 수능에서 언급될 가능성이 있는 소재들, 즉 교육 과정 안에 직접적으로 있는 소재들과 교육 과정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추론될 만한 소재들만 모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래의 내용들을 외우려고 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생윤이든 윤사든 윤리 과목은 근본적으로 선지나 글을 축자적으로 외웠다가 시험지 앞에서 주화입마에 빠져서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과목입니다……. 부디 이 글을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의 윤곽을 잡고 그들을 이해하는 용도로 써 주시기 바랍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의 차이: 목적론 vs. 기계론
스토아학파는 고대 헬레니즘의 학파로서,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막대한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과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파악했듯이, 스토아학파도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파악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연쇄를 기억하시나요? 식물은 동물을 위해,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죠. 스토아학파는 이 연쇄를 발전시킵니다.
스토아학파는 인간 자신은 세상(자연)을 사유하고 모방하기 위해 존재하며, 자연은 인간에게 우호적인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어째서 자연이 인간에게 우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바로, 앞선 연쇄에서 자연의 모든 사물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유용하게끔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자연은 인간에게 우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이처럼 스토아학파는 목적인(目的因, telos)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한편 스피노자는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이해를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요컨대 자연이 가지고 있는 목적 따위는 없고, 자연은 오로지 자기 필연성, 즉 작용의 인과성에 의해서만 자신을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자연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도 특정한 목적에 의해 기획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본성적 역량(potentia)으로 말미암아 자연 만물이 그렇게 존재할 뿐입니다. 물론 스토아학파도 자연의 인과적 필연성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스피노자의 주장에서는 그 의미가 기계론적 세계 이해로 확장되어 더 강한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눈치채셨을 수도 있겠는데, 인격신을 부정하는 정도도 스피노자가 스토아학파보다 훨씬 더 큽니다. 혹시 여러 해의 연계 교재를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스토아학파가 Zeus(이거 오르비에서 금지 단어인가요?)를 거론하는 장면을 몇 번 보신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의 이름을 Zeus로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보나(물론 이름을 Zeus라고 부른다고 해서 꼭 인격신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자연의 목적인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나, 자연을 철저하게 목적 없는 인과 기계로 보는 스피노자에 비해 인격신을 부정하는 정도가 약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스토아학파가 인격신을 긍정했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등)가 유행하기 전, 스토아학파의 시대에서는 인격신과 비인격신의 구분이 분명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아주 명백하게 인격신을 부정했지만, 스토아학파는 인격신을 딱히 명시적으로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듯합니다(적어도 저는 그런 문헌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그런 구분을 할 이유가 없었겠죠.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인격신 관련 지점에서는 단지 ‘상대적’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 정리해 봅시다. 첫째, 스토아학파는 자연의 목적인을 인정했고, 스피노자는 부정했다. 달리 말해, 스토아학파는 목적론적 자연관을, 스피노자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 중 인격신을 부정하는 정도는 스피노자가 (상대적으로) 더 크며, 더 명시적이다.
세계는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면은?
스토아학파든 스피노자든 외면 세계의 결정론을 받아들입니다. 외면 세계는 자연의 인과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된 채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데는 스토아학파도 스피노자도 모두 동의했습니다. 둘의 차이는 의지, 감정 등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까지도 결정론을 주장하느냐 아니냐입니다.
아래의 인용문은 스피노자가 『에티카』 전체를 통틀어서 단 한 번 스토아학파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이 둘의 차이를 어느 정도 드러내 줍니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이성이 정서를 억제하고 조정하기 위해서 이성이 정서에 대하여 얼마나 크고, 그리고 어떤 종류의 권력을 가지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서에 대하여 절대적 권력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앞에서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스토아학파는 정서가 절대적으로 우리들의 의지에 의존하며 우리는 정서를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원리가 아니라 경험의 항변에 의해서 정서를 억제하고 조정하는 데는 적지 않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만일 내가 옳게 기억한다면) 두 마리의 개, 즉 집 지키는 개와 사냥개의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집 지키는 개를 사냥하도록 하고, 반대로 사냥개가 산토끼를 쫓아가지 않도록 훈련을 통해 길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 제5부 머리말, 강영계 역 -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스토아학파는 외면 세계를 받아들이는 인간 내면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요컨대 외면 세계는 한낱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은 외면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 판단, 의지, 감정 등의 내면은 인간이 스스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을 자기 뜻대로 바꾸려 하지 말고, ‘자기 뜻’을 외부를 거스르지 않게 맞추라는 이야기입니다. (정신 승리……?) 그리고 이렇게 자기 내면을 바꾸는 일은 이미 결정되어 버린 사태가 아니라, 의지의 자유에 따른 것입니다.
한편, 스피노자는 외면 세계는 물론이고 인간 내면에 대해서까지 결정론을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감각하는 물질의 영역이 물리 법칙과 같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듯이, 인간 정신의 영역도 정신 간의 필연적 인과로 인해 결정됩니다(교육 과정 내에서 이해하기 쉽게 대강 설명했는데, 혹시 의문점이 있다면 스피노자의 심신 평행론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물론 인간의 정신이 자연 세계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마음의 평온을 누리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 보존 성향(conatus)에 의해서 말이죠. 다만 그런 노력 자체도 이미 앞선 정신들의 인과 연쇄에 따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결정된 사태입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스피노자는 스토아학파보다 더 구체적인 개념들(사유, 연장, 실체, 속성, 양태 등)을 활용했으며, 둘의 철학적 기획의 출발점부터 달랐기 때문입니다. 스토아학파는 헬레니즘 시대 당시 시국이 늘 혼란스러운 와중에 개인이 안심입명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고, 스피노자는 가장 완전한 존재(신)로부터 사유를 시작해 세계를 관조함으로써 가장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혼란 와중 개인의 입지를 찾으려던 스토아학파의 출발점이 외면 세계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부동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로 향하고, 자연 세계의 필연성으로부터 지복을 누리려던 스피노자의 출발점이 외부 사물의 필연성과 인간 정신의 필연성으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자, 정리해 봅시다. 첫째, 스토아학파는 인간 내면에 대해서까지 결정론을 주장하지는 않았고, 한편 스피노자는 외면은 물론 내면에 대해서까지 결정론을 주장했다. 둘째, 하지만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 모두 인간 내면의 노력 가능성을 인정했다. 물론 스피노자에게는 그 노력마저도 결정된 것이다.
감정에 대한 이해의 차이
스토아학파는 감정(pathos, 정념)을 기본적으로 영혼의 병리적 현상이자 인간의 결함으로 이해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알고 계실, 스토아학파가 인정했다는 자연적 정념들은 예외일 뿐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일단 감정을 ‘번뇌를 만드는 악재’ 정도로 이해하고서 감정(pathos)이 없는(a-) 상태(-ia)인 부동심(apatheia)을 추구한 것입니다.
한편, 스피노자는 감정 자체를 단지 ‘자연 내의 현상’으로 취급하면서 접근했고, 감정을 능동적 감정과 수동적 감정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수동적 감정만을 정념이라고 부르면서 ‘감정’이라는 넓은 의미의 단어와 ‘정념’이라는 좁은 의미의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수동적 감정, 즉 정념은 인간을 예속된 상태에 놓이도록 만들지만, 능동적 감정은 오히려 인간의 자기 보존을 도와 코나투스에 부합하며 또한 코나투스를 증진합니다.
여기서 여러분께서는 스토아학파보다 스피노자가 한참 더 감정에 우호적임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인간을 괴롭히는 병리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감정이 없는 경지(물론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경지에서도 예외적으로 용인되는 감정들이 있기는 합니다.)를 추구했고, 스피노자는 수동적 감정은 없애 나가되 능동적 감정은 오히려 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요. 이런 감정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소극성과 스피노자의 적극성은 바로 다음에 소개될 행복 관념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소극적 행복 vs. 적극적 지복
스토아학파가 규정한 행복은 그저 아파테이아일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아파테이아란 ‘감정이 없는 상태’로서 아주 소극적인 개념입니다.
한편 스피노자가 규정한 지복, 즉 최고의 행복은 ‘신을 인식함으로써 생기는 정신의 만족’입니다. 이렇게 이해되는 지복은 일종의 ‘만족’으로서 그 자체로 정서적인 개념입니다. 스토아학파보다 얼마나 감정에 우호적인지 다시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스토아학파는 행복을 감정의 ‘결여’ 상태로 이해한 한편, 스피노자에 따르면 지복이란 신을 인식한다는 구체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자, 최고의 능동적 감정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자, 마지막으로 정리해 봅시다. 첫째, 스토아학파는 감정이 없는 상태를, 스피노자는 수동적 감정이 없고 능동적 감정이 충만한 상태를 지향했다. 둘째, 그로부터 스토아학파는 행복을 아파테이아로 규정했고, 스피노자는 지복을 정신의 최고 만족으로 규정했다.
이상으로 분석을 마칩니다.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하나 덧붙이자면, 스피노자의 사회 참여에 관한 소재도 교과서 내에 있기는 한데, 수능에서 스토아학파의 세계 시민주의와 비교되는 지점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는 않아 보일뿐더러, 어떤 교과서로 공부했느냐에 따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이지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아서 그냥 해당 교과서 서술을 아래에 별첨해 두겠습니다. 원하시면 참고 바랍니다.
참, 그리고 아마도 스토아학파가 ‘자유 의지’를 인정했느냐 아니냐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아쉬울 분들이 계실까 봐 간단하게만 말씀드리자면, ‘자유 의지’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비교 지점으로는 성립하기 어려워서 다루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자유를 가지는 의지’로 해석하면 스토아학파가 자유 의지를 인정했다고 해야 하고(‘의지의 자유’를 말하려거든 ‘자유를 가지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니까요.), 사전적인 의미로 ‘외부의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어떤 목적을 스스로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의지’로 해석하면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야 합니다. 말의 해석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면, 스토아학파가 해당 개념을 원전에 쓰지 않은 이상 애초에 스토아학파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선지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아니, 나와서는 안 되죠. 그냥 스피노자가 아주 명확하게 자유 의지를 부정했다고만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진짜로 마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도덕·윤리 연구소 소개
이상 도덕·윤리 연구소는 최근 수능에 대한 감각과 교과 지식이 충분한 대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윤리 전공자와 타과 전공자를 아우르고 있어 균형 잡힌 시각에서 모의고사를 제작한다. 수험생분들의 수능 대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오류 없는 문제, 쉽지 않은 문제, 깔끔한 문제를 지향한다.
이상 도덕·윤리 연구소 연구원
- 임재섭 서울대학교 철학과
- 강승철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 김성민 서울대학교 인문계열
- 박세은 서울대학교 철학과
- 박정민 건국대학교 철학과
- 박정민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 여지선 동국대학교 철학과
- 임재원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 조민준 서울대학교 철학과
이상 도덕·윤리 연구소 약력
2021년
-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 Éthique Fatale 모의고사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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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애먹었던 부분인데….이건 귀하군요 두고두고 읽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