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랏멍뭉이 [503209] · MS 2014 · 쪽지

2021-01-13 02:42:48
조회수 3,658

6개월 전에 썼던 글

게시글 주소: https://1ff8ipsi.orbi.kr/00035086724

나는 지금 얼마나 성장했나





20200801


한 시 조금 넘어서 잠이 들었다.  


처음 아팠을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아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늠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지났고 몸과 머리가 커졌다. 여전히 나는 아픈 사람이었다. 삶의 어떤 순간에도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분리해 생각할 수 없을 때 다가오는 묵직한 마음이 있었다. 그 때 어렴풋이 아픈 것이 어떤 의미인가 생각했다. 


그럼에도 매몰되지 않고 살았다고 회상한다. 내가 붙든 것들은 나의 질환과 상관없이 온전했다. 성취도 사람도 그러하다. 빛나는 사람들. 어떤 절망 앞에서도 밥은 따뜻하게 먹길 바라주었던 가족들. 마음을 썼던 흔적들. 입에서 독을 내뱉어서라도 지키는 게 기꺼웠던 사람들. 스무 살의 앞과 뒤는 이런 기억들과 맞닿아있었고 나는 길거리를 성큼성큼 쏘다니던 인간이었다.  


스물다섯의 나는 어떠한가. 시는 온몸으로 쓰는 거라던 시인마냥 서슬 퍼런 인간이 못 되어 내 몸은 쉽사리 짓무른다. 분노는 이제 동력이 되지 못하고 시시한 복통만 유발할 뿐이다. 한 발짝 정도 물러나서 이야기하고 한 발짝 정도 뒤에서 화를 내는 사람. 관점에 따라 환경에 맞게 진화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무뎌진 만큼 편해지진 않았다. 


드라마 <SKY캐슬>의 혜나를 사람들이 욕할 때도 나는 미지근하게 마음이 쓰라렸다. 그것 말고는 별 다른 수가 없다면 혜나는 징그럽기보단 꿋꿋한 아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모 아니면 도인 상황에서 버텨내기 위해서는 말랑한 마음을 제 손으로 일그러뜨리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고 누나는 혜나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혜나가 드라마에서 꽤 이르게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장한 혜나를 볼 수 없었다. 다만 드라마가 엉뚱하게 끝나고 나서 문득문득 생각은 했다. 혜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래야만 하던 상황들에 아직 사로잡혀 있을까.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 지난한 상황들에서 놓여나고서는 미워할 시간을 가졌을까. 아니면 문득 치미는 화에 당황하며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을까. 


어제는 애인과 사운드마인드에 갔다. 다시 만나기로 한 날 듣던 음악을 들었다. 조금만 더 있다 일어나자 말했을 무렵 두 사람이 들어왔다. 우리를 보며 수군대고, 사장님에게 술을 권하고 - 진상이란 말이 사람이 된다면 저렇겠다 생각이 들 즈음 일어났다. 계산하는 우리를 보며 킬킬대며 웃다 오빠 가잖아, 그렇게 말했다. 


집에 돌아와서 계속 어떻게 했어야 했나 생각했다. 스무 살의 나라면 테이블로 가서 상기된 얼굴로 잠깐 밖으로 나오라고 말했을 터이고, 더 어린 나는 눈물을 터뜨렸을 텐데 스물 다섯의 나는 계획이 없었다. 그냥 배만 조금 아프고 울적했다. 답이라도 알면, 아니 안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은 명료했을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화를 버틸 수도 없고 아무렇지 않을 수도 없다면 무엇을 해야하는 거지? 혜나가 생각났다. 시퍼런 눈으로 사과를 씹었을까,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눈물을 떨궜을까. 아니면 태연한 척 지나갔을까. 사실 그것도 마땅한 답이 되진 않았다.


자정이 넘어 도착하고 애인과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누워서 행복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혼자 두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열일곱을 거쳐 스물을 거쳐 스물다섯까지. 헤매던 날들에도 그 말에는 기댈 수 있었다. 그런 말들이 붙잡아준 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반정도 답을 내렸다. 어떤 사람이 되든 사람을 아끼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어떻게 행동하든 미움에 마음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서툴어도 그런 마음으로 가다보면 서른 다섯 쯤의 나는 좀 더 세련미 넘치는 인간이지 않을까 기대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행착오로 다져진 배짱 두둑하고 익살스러운 서른 다섯 인간. 어쩐지 사랑스러운 느긋한 인간. 사실 그런 나를 상상해보다 혼자 우스워져서 좀 웃기도 했다. 


어떻게 나는 잘 잤다. 내일은 그 전부터 보고 싶던 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 늦잠도 잘 것이다.

0 XDK (+15,500)

  1. 15,000

  2. 500